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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옥

    촌옥은 지금으로부터 500여년전인 명나라 홍치년에 태어났으며 홍치, 정덕, 가정, 융경, 만력 5조를 겪었다. 그의 집은 화순교두(현재 화순도서관옆 대교 골목)에 있으며 화순인들은 그를 “교두나리”라고 불렀다. 명나라 정덕년에 촌옥는 조정에 선출되어 관리가 되었으며 옹제사서반의 직책을 맡았다. 현재의 외교부의 전사관리와 같다. 사이관교수를 겸임했으며 현재의 외교학원의 교수와 같다. 촌옥은 유학도 잘 알고 이어에도 정통하여 중국과 동남아시아, 남아시아의 교류에 기여했다.

    역사자료에 의하면 명나라시대의 화순인세대는 조정에서 관직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았으며 같은 나라에서 관리를 맡은 화순인은 11명에 달했다. 촌옥의 부친 촌문빈도 홍이사서반의 직책을 맡은 적이 있다.

    촌옥은 홍이사서반을 임했을때 부지런하고 성실했으며 좋은 성과는 황제의 칭찬을 받았다. 정덕11(1516), 황제는 그의 공적을 전문적으로 표창하라고 지시를 내렸으며 성적이 성실하다라고 그를 평가했다. 촌옥의 박학다재하고 외국어에 정통하며 청렴한 정치를 표창하기 위해 등사좌랑의 관직을 봉했다. 촌옥은 조정을 위해 70여세에 이르러서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명나라 만력년 텅월찬장 등자용은 백발조의라는 큰 현판을 써서 촌옥의 공적을 회상했다. 촌옥이 백발이 성성한 고희의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게 황제를 면전했으며 국가를 위해 힘을 다했다.

    촌옥이 사람들속에서 기억되는 또 하나는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 화순백성들을 이끌고 강하를 수리하고 수해를 다스린 공적때문이다. 명나라 초기에 장마철이 되면 대영강수위가 폭등하여 화순댐을 넘어 범람하여 화순댐은 물바다가 되었으며, 강물은 좋은 밭을 무너뜨려 백성들은 해마다 수해에 시달렸다. 촌옥이 고향에 돌아온 후 자신의 위망을 이용하여 군중을 동원하여 대영강을 수리하고 수해를 다스렸다. 민간에는 “교두나리는 이 강을 다스리고, 황하구곡 18만을 모방한다”라는 설리 있다. 촌옥의 지도하에 화순의 수해는 다스려졌고 화순의 6000료의 경작지는 가뭄과 침수에도 수확을 보장하는 좋은 밭이 되었다. 그밖에도 촌옥은 자금을 출자하여 다리를 수리하고 도로를 보수하는 등 많은 공익을 했다. 화순마을 입구의 쌍홍교중의 노교가 촌옥이 건설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다리가 무너지면 비석을 수리하고, 비석이 넘어지면 스스로 수리한다”라는 이야기도 남겨졌다. 다리를 건설한 후 그옆에 “다리가 무너지면 비석을 수리하고 , 비석이 넘어지면 스스로 수리한다”라는 비석을 세웠으며, 당시 다리를 건설하는데 쓰고 남은 은을 비석밑에 묻어 후세사람들이 다리를 보수할때 쓰도록 남겼다. 나중에 한무리의 지나가던 이방인들이 비석을 무너뜨리고 비석밑에 묻어둔 은을 파내어 도망쳤다.

    민국원로 이근원선생은 일찍이 촌옥의 공적을 칭찬했다. ”강하는 구곡을 맴돌고, 교두는 나리가 여셨다. 이 사람은 두눈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다시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