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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무화

    영무화상호의 창시인은 이필성(자 영무)이며 도광30년(1850)전후에 미얀마에서 영무상점포(영무와상호의 전신)를 개설했으며 보석옥기와 백화점을 경영했다. 광서 19년(1893)에 자본은 루피3만여돈을 모았다. 차남 이덕현에게 경영을 맡겼다. 광서23년(1897)에 자본은 루피10만여돈을 모았으며 업무를 확장하기 위해 이덕현은 상가를 미얀마수도 만델러로 옮기고 “영무화”로 이름을 바꿨다. 고향친구들을 요청하여 자금을 모아 가입시켰으며 이덕현이 사장을 맡았다. 장수삼은 부사장을 맡았다. 만델러에 총호를 설립했고 선후로 양곤, 석복, 납술, 팔모, 남칸, 과령, 서보, 멍공 등지에 지점기구를 설립했다. 동시에 이덕현이 출자했으며 그의 형 이덕작과 허탁여, 가상곤은 “영생원”호로 합작하여 전면수출입무역을 경영했다. 텅총에 총호를 설립하고, 이덕작이 책임졌다. 바오산, 하관, 쿤밍에 분호를 설립하고 이덕작, 허탁여, 가상곤이 각각 책임졌다. 1924년, “영무화”는 또다시 출자하여 사조동, 명자장과 쿤밍에서 합작하여 “영춘화”상호를 만들었다. 쿤밍, 홍콩, 상하이, 양곤사이에서 생사와 외환업무를 경영했다. 1929년까지 명자장이 상하이에서 병으로 사망한 뒤 합작을 끝냈다.

    1927년에 이덕현의 아들 이경천은 영무화사장을 이어받고 자본을 30여만돈으로 증가시켰으며 은원으로 계산하면 60여만원이다. 1933년 영무화와 영생원은 합병이 되었으며 외국에서는 영무화브랜드를 사용했으다. 중국에서는 영생원브랜드를 사용하고상하이분호를 증설했다. 이덕작은 2개 상호의 사장을 맡았으며 이경천은 상하이분점사장을 맡았다. 1937년 영생원의 주주 허, 가 두집은 탈퇴했고 영생원상호는 계속 경영했다. 영무화는 쿤밍, 하관, 바오산, 텅총에 영리상호를 설립하고 상하이분호를 철수했다. 1938년 전면도로가 개통한후 “영무화”총호는 쿤밍으로 옮겨졌고 영리상호의 이름를 취소하고 “영무화”상호이름을 통일적으로 사용했다. 이경천은 사장을 맡았으며 중국에는 텅총, 바오산, 하관 등 3개의 분호가 있고 해외에는 만델러, 양고, 납술 3개의 분호를 보류하고 기타 지점은 모두 철수하여 소액주주에게 나누어 경영하게 했다.

    “영무화”는 주요 윈난 미얀마의 수출입업무에 종사하며, 생사, 면화, 면사, 차잎, 담배, 술, 토산물, 은 등을 경영했다. 년간 수출생사는 약 2000짐이고, 년간 수입면화는 1만짐정도, 면사는 4000~5000건, 년간수입은 미얀마화페로 60만~70만돈이다. 항일전쟁기간 전면도로는 중국의 유일한 국제통로가 되었다. “영무화”는 물자를 빠르게 운송했으며 닷지차 10대를 구입하고 인상차20대를 렌트하여 밤낮으로 서둘러 운송했다.。

    1942년 일본이 미얀마와 텅총을 점령한 후 영무화의 미얀마업무는 중단되어 재산손실이 컸으며 다른 경영경로를 개척할수 밖에 없었다. 영무환은 충칭, 이빈과 자공 3곳에 분호를 세우고 부동산을 구입했다. 이와 동시에 본성 조통에 분호를 설리하고 3지역을 하나로 모았다. 주로 토포, 토사, 비단 등 상품을 경영했으며 자공에서는 석탄을 경영했다. 이밖에 영무화는 부동산을 투자했으며 쿤민의 시중심 남병가에 빌딩7채를 건설하고 아파트 2채를 구입하여 쿤밍에서 서장을 거쳐 인도로 가는 상로를 개척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한 후 영무화전면무역업무는 빠르게 발전했고 1950년말까지 국내외의 자산총액은 이미 520만돈을 초과했다. 1956년 영무화는 공사합영에 참가했다. “영무화”상호는 화순근대부상들의 대표이다. 상호는 5대를 거쳤으며 100여년의 휘황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과거에 텅총민간에는 “동동, 서동, 완루즈는 부잣집”이라는 말이 있었다. 지금의 완루즈 이씨의 가문은 미얀마, 태국, 싱가포르, 캐나다, 홍콩, 대만 등 13개 국가와 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자손이 번창하고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영무화 이씨형제